여행자의 서재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염이야 2018. 8. 3. 21:57

이 책의 저자는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30년간 신춘문예에 매달렸다 한다. 그러다, 나이 쉰을 앞두고 노안으로 돋보기 안경을 쓰면서 '인생 볼 장 다 봤다'는 절망감에 절필을 선언했다는데.. 그 선언 후 4년이 지나 떠난 아이슬란드 여행. 그녀는 실패를 찬양한다는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돌아봤을까? 실패? 성공? 혹은 다른 것?

 

책에서_1

 

"엄마, 왜 그때는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어요?"

"너희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연락 못 하게 하셨어. 너희들이 어려서 힘들어한다고."

"아, 그랬어요? 나는 몰랐어요."

"엄마는 왜 아빠에게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어요? 미국에선..."

"이혼할 때 2층짜리 그 큰 집이며 살림들을 모두 아빠에게 넘겨주고 엄마는 빈 몸으로 나왔어. 대신 양육비는 아빠가 다 책임지기로 했고... 아니, 아빠가 진 카드빚 6만 달러에서 반을... 그러니까 아빠 빚 반을 갖고 나왔어."

"아, 나는 몰랐어요."

"그 빚을 혼자 갚을 수가 없어서 결국 파산신고를 해야 했고... 너희들한테 할 말이 없어. 많이 미안해. 그때는 엄마가 지금 너보다 더 어린 나이였는데 갑자기 세 아이의 엄마가 됐고 아무것도 몰랐어. 아니, 그건... 네가 한국말을 못하는 건 네 책임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 않아... 아니, 아니... 그건, 그런 게 아니고... 그건, 그러니까..."

점점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그나마 아는 단어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아무리 참으려고 애써도 눈물이 자꾸 흘렀다.

'너희들은 5년쯤 있다가 아이를 낳을 계획이라고? 그래, 너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가 된다는 게 뭔지 아직은 모르겠지. 나는 스물여덟 시간 산통 끝에 네 오빠를 처음 안았을 때 아, 세상에 정말 기적이 있구나 싶었어. 축복처럼 낵내게 온 아이. 아이를 낳을 때 겪은 산통이, 하늘이 수백 번 뒤집어지던 그 고통이, 그 기적을 더 고귀하게 만드는 거다 싶었지. 모성애일까?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게 나도 신기했어. 그런데 3개월 만에 또 임신을 했고... 또 스물여섯 시간 진통 끝에 자연분만으로 쌍둥이 딸, 너희들을 안았을 때는... 두려움이 밀려왔어. 갑자기 내 인생에 나타난 세 아이들이 나는... 그때부터 의무감과 책임감에 짓눌리기 시작했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어.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들었지. 게다가 너희 아빠와는...'

이런 얘기들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전남편에 대한 원망과 회한도 이제 다 큰 딸에게 풀어놓고 싶었다. 전남편에 대한 원망과 회한도 이제 다 큰 딸에게 풀어놓고 싶었다. 엄마 없이 크면서 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듣고 싶었다. 그러면 지난 시간들이 좀 홀가분해질까. 그러나 그런 말들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눈물과 흐느낌만이 계속됐다. '인생 실패자'의 모습으로 딸 앞에 앉아... 이성적인 딸은 내 눈물에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엄마, 이제 다 이해해요. 엄마고, 딸이니까.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나를 달래려고 딸이 애쓸수록 나는 감정을 더 추스를 수가 없었다. 딸과 내 역할이 바뀐 것 같았다. 현명하고 침착한 엄마 역할을 딸이 하고, 나는 그녀의 철부지 딸인 듯하고.

 

책에서_2

 

"아이슬란드엔 왜 왔어요?"

할머니가 다시 뜨개질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지난 6월말 헤이마에이 섬에서 만났던 목장 할머니도 내게 왜 왔냐고 물었는데. 그때 나는 그냥 여행 왔다고 대답했었지. 같은 질문을 아이슬란드 할머니에게 두 번째 듣는 거였다.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에 나오는 글이 떠올랐다.

"우리는 훌륭햔 실패담을 사랑한다. 그 이야기의 결말이 성공으로 끝나기만 한다면. 몇 번이나 실패를 겪은 뒤 눈부신 아이디어로 대박을 터뜨린 기업가의 이야기, 출판사에서 몇 번이나 퇴짜를 맞은 적이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서 실패는 성공의 맛을 더 달콤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애피타이저처럼. 하지만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실패는 메인 코스다."

나는 메인 코스의 음식을 펼치듯 더듬더듬 내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두어 마디밖에 말을 나누지 않은,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에게 그동안 버겁게 끌어안고 다니던 비밀을 누설하듯, 고해성사를 하듯 내 인생의 추레한 그 시간들, 결혼 실패, 꿈 실패, 사랑 실패를 펼쳐 놓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모르겠다. 실례이다 못 해 무례한 짓일 수도 있는데. 할머니는 뜨개질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내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후우~ 내가 얘기를 다 끝내고 긴 한숨을 토하는데, 할머니가 물었다.

"당신, 인생 실패한 사람 맞아요?"

"네?"

"당신은 쓰고 싶은 글 쓰며 살았잖아요. 그랬으면 됐지, 왜 실패자라는 거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당신이 인생을 다 실패했다니, 난 당신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신에겐 사는 게 뭐죠?"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푸른 호수처럼 고요한 눈빛. 그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를 격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마워요, 고마워요.' 내 얘기를 그렇게 털어놨던 건 이런 위로가 필요해서였나.

 

이 책엔 사실 아이슬란드 여행에 관한 정보도 그닥 나와 있지 않고, 또한 저자가 히치하이킹하며 여행 다닌 곳은 동서남북 뒤죽박죽이며, 때때로 너무나 즉흥적이라 너무나 무모한 여행이라 솔직히 따라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는 저자의 마음과 아이슬란드가 만나 끓어오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지점들이 있다. 그 지점들이 다른 여행책과 이 책을 구별시키고 추천하고 싶게 만든다.